예술을 경험하는 새로운 방법 기타 December, 2019 미술관이 부활하고 있다. 짧게는 수십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이 넘은 건물에 예술의 입김을 불어넣어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 일이 전 세계적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재생건축으로 대변되는, 오늘날 미술을 향유하는 또 하나의 방식에 관하여.

고흐의 ‘해바라기’와 ‘밤의 테라스’가 탄생한 곳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도시 아를(Arles). 얼마 전, 이 아름다운 도시의 구시가지에 있는 중세 저택 오텔 드 베르농(Hotel de Vernon)에 이우환미술관이 문을 연다는 보도가 전파를 탔다. 2018년 오래된 저택을 매입한 이우환 재단은 안도 다다오에게 개조를 맡겨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진행했는데, 일찍부터 많은 미술 애호가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 문화 수준의 향상과 경험 가치를 즐기는 이들이 늘면서 고급 취미 활동의 영역이던 미술 그리고 그것을 접할 수 있는 미술관이 일상속으로 들어왔다. 개중에서도 눈에 띄는 특징이 바로 재생건축이다. 발전소를 개조한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세계적인 성공 사례를 필두로 전쟁을 위한 군사 시설이 국립박물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잠수함 기지가 거대한 디지털 아트 전시장으로 바뀌는 세상이다. 6년 전, 옛 기무사 건물을 리모델링해 재탄생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이르기까지 새로 태어난 미술관은 한결같이 시간을 머금고 세월을 버텨낸 고건축물에 상이라도 주듯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곳
깨끗하고 말끔한 무색무취의 공간. 화이트 큐브라 불리던 미술관이 사연 많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있다. 이른바 재생건축은 과거의 아픈 기억 치유나 영광의 부활이라는 테마로 나뉘는데 여기에 ‘예술’이라는 또 하나의 경험을 더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베이징의 군수공장이었던 따산즈에는 공장을 스튜디오로 쓰는 예술가가 몰려들며 ‘따산즈798’이라는 독특한 집합예술촌이 만들어졌고 이를 시작으로 베이징, 상하이, 홍콩 등에서 쓰임을 다한 폐건축물이 재조명되며 뉴트로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자원을 자랑하는 상하이는 최근 몇 년 사이 리모델링 미술관을 줄줄이 개관했는데 그중 도축장을 개조한 ‘라오창팡1933’은 소를 몰고 가던 좁은 길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구조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 갤러리와 카페, 쇼핑을 두루 품은 문화 공간으로 바뀌자 대중은 열광했다.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PSA(Power Station of Art)’, 방직 공장 지대를 문화예술지구로 탄생시킨 ‘M50, 모간산루(莫干山路) 50’까지 재생건축 미술관을 여행 테마로 잡아도 될 정도로 풍부한 콘텐츠를 구비해놓았다. 싱가포르는 아예 국가 시책으로 1990년대 이후 식민지 시대 관청가 대부분을 예술 공연 시설로 리모델링해왔다. 덕분에 식민 통치 정청 건물에는 빅토리아 아트센터가, 옛 통관소 건물에는 아시아문명사 박물관이 들어섰다.

최근 홍콩에서 가장 따끈따끈한 곳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타이쿤(Tai Kwun)’을 꼽을 수 있다. 얼마 전까지 루이비통의 가구와 소품 전시가 열린 타이쿤은 170년이 넘은 옛 경찰서이자 교도소를 세계적 건축사무소 헤르조그&드 뫼롱(Herzog&de Meuron)이 재건축한 것으로 독특한 건물의 스토리와 함께 단숨에 홍콩의 명소로 떠올랐다. 기피 시설이었던 교도소가 예술과 문화의 장소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록펠러가 아시아와 미국의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한 비영리 기관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1860년대 지은 영국군의 해군 기지이자 탄약 제조 창고를 개조한 건물을 쓴다. 바닥에는 탄약을 운반하던 철길이 그대로 있고 군데군데 해군 기지일 때 사용하던 시설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동서양이 묘하게 교차되는 중첩의 공간은 고도로 산업화된 도시 국가 홍콩 속에서 오아시스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밖에도 100년이 넘은 경찰 기숙사 건물을 개조해 예술과 쇼핑을 함께 즐기는 명소로 자리 잡은 PMQ, 섬유 공장을 리노베이션한 새로운 전시장 샷(CHAT) 등 역사의 건물을 개조한 미술관이 끊이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바다 건너 유럽으로 가보면 더 유명하고 대표적인 사례가 즐비하다. 켄징턴으로 이사한 런던 디자인 뮤지엄이 처음 1989년 문을 열었던 타워브리지 근방의 뮤지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템스강 남쪽의 바나나 창고 건물을 개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당시에는 재생건축이 미덕이 아니었기 때문에 드러내놓을 만한 스토리가 아니었을 테다. 미국 쿠퍼휴이트의 스미스소니언 디자인 뮤지엄 역시 1901년 지은 미국 최대 철강 회사의 소유주 앤드루 카네기의 대저택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내년 봄 파리에 개장하는 현대 예술 공간 피노 컬렉션 역시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옛 상업 거래소 건물을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De Agostini Picture Library
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사용했던 잠수함 기지를 거대한 디지털 아트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프랑스의 빛의 수조(Bassins de Lumi?re). 파리의 빛의 아틀리에(Atelier des Lumi?re), 레 보드 프로방스의 빛의 채석장(Carri?res de Lumi?res)과 함께 컬처 스페이스사가 몰입형 미디어 아트 기술 아미엑스(AMIEX)를 사용해 구현한 미디어 아트 뮤지엄 시리즈 중 가장 큰 버전이다.



숨은 보물찾기
국내도 다르지 않다. 폐산업 시설로 방치되던 옛 담배 공장의 연초제조창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가동이 중단될 때까지 청주의 대표 산업 시설 역할을 해오던 유서 깊은 곳이다. 새로 태어난 청주관은 국내 최초로 개방형 수장고 방식을 택해 독특한 인테리어와 새로운 관람 경험을 제공한다. 관객과 거리낌없이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창고형 마켓 인테리어로 해소한 것인데, 마치 이케아나 코스트코에 온 것같이 대형 랙이 즐비한 창고에 빼곡한 작품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감상하는 파격적인 동선을 연출한다. 이 외에도 2015년 개관한 화성의 ‘소다미술관’은 오랜 시간 흉물스레 방치된 대형 찜질방을 리모델링해 문화 재생 공간으로 둔갑시켰다.

역사와 예술은 묘하게 닮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깊어진다는 점, 관심을 기울여 발견할 때래야 비로소 가치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람을 위협하던 곳이 예술과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하고 피비린내 나던 건물에 커피 향이 진동한다. 미술관 디자인은 그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긴 오래된 건물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아니던가. 결국 유산을 발굴하고 합당한 가치를 부여해 새로운 쓰임새를 만드는 일은 트렌디한 작업이자 미래지향적인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고급문화라는 편견을 벗고 일상 속으로 가깝게 다가온 미술관, 스토리와 지적 호기심에 허기진 이에게 시간과 공간 모두를 탐사할 수 있는 다채로운 행보는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예술의 숨결이 다시금 살려낸 근대 문화유산은 보존과 리모델링의 경계에서 어디까지 줄타기를 할 것인가라는 숙제를 던진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것이 공간이든 시스템이든 기존의 고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일관된 방향일 것이다.


2 군사 시설을 리모델링해 장대한 스케일을 뽐내는 에스토니아 국립박물관.
3 1901년 지어진 미국 최대 철강 회사의 소유주 앤드루 카네기의 대저택을 개조한 스미스소니언 디자인 뮤지엄.



안지용 건축가는
매니페스토 디자인랩의 안지용 대표는 명동의 M플라자, 코엑스 메가박스의 공간과 브랜딩 리뉴얼, 삼성+하만(HARMAN) AV 공간 기획, 남산타워 리뉴얼 기획, 복합쇼핑몰 동춘175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리뉴얼한 건물의 가치가 상승하고 새롭게 기획한 공간이 핫 플레이스가 되면서 상공간 전문 아키텍트로 자리매김했다. 뉴욕에서 활동했을 당시 미국건축가협회 디자인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실력파로 한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 3년 연속 한국건축가협회 100인의 건축가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Red dot, iF, IDEA의 디자인상을 모두 수상했다.

이향은 교수는
UX 트렌드와 사용자 심리를 연구하는 성신여자대학교 서비스디자인공학과 이향은 교수는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와 함께 트렌드를 연구하며 <트렌드코리아 2011>부터 <트렌드코리아 2020>까지 총 10권을 공동으로 집필했다. 2012년 서울대학교 디자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향은 교수는 세계적 권위의 디자인 어워드인 독일 iF Design Award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교육 외에도 디자인과 소비 문화를 아우르는 통찰력을 갖고 있는 전문가로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대유 위니아 등 기업들의 디자인 경영 컨설팅과 자문, 혁신 제품 콘셉트 개발과 같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Editor홍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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