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미술관, 그리고 공간의 힘 기타 September, 2020 미술관의 형식에서 탈피해 자연과 하나 된 21세기 미술관. 이곳에서 발견한 것은 건축이 완성한 조화, 그리고 우리의 자아다.

어느 해 8월 뜨거운 여름날, 고마츠 공항에 내려 가나자와로 향하는 길이었다. 초행길이라 물어물어 발걸음을 옮기는 여정 중, 어느 친절한 리무진 버스 기사의 친절한 답변과 함께 경쾌한 오케이 사인은 더운 여름 열기를 잊게 할 만큼 청량했다. 이것이 가나자와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평소 아시아권이나 유럽으로 자주 출장을 떠나지만, 공항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일은 생경했다. 비행기가 영동고속도로 위를 지나자 문득 일본행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일본 가나자와현. 이곳을 알게 된 건 단 하나의 건축물 때문이었다. 지름 100m가 넘는 거대한 원형의 현대 미술관, ‘21세기 미술관’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사나(SANAA, 세지마 가츠요+니시자와 류에)가 설계한 곳으로, 1995년 지어져 지금까지도 건축가와 공간 디자이너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소 중 하나다. 이곳을 한 번이라도 방문한 사람이라면 입을 모아 ‘매력적’이라는 찬사를 입에 올렸고, 나 또한 다녀오고는 한참 동안이나 가나자와에 빠져 있었으니 그 매력을 실감할 만하다.


21st Century Museum of Contemporary Art, Kanazawa ⓒWATANABE Osamu
일본 가나자와현에 위치한 21세기 미술관의 전경. 지름 100m를 넘는 원형의 건축물은 공간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자연과의 일체감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각자 모여 하나를 완성하는 하모니
공원을 품고 있는 커다란 원형의 미술관은 동서남북에 4개의 출입구로 앞 뒤 구분 없이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누구든 드나들 수 있고, 어디든 걸터 앉을 수 있어 ‘지역 주민들의 문화 공간’이라는 초기 미술관 기획 콘셉트가 지금까지도 잘 유지되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외부와 맞닿는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 미술관을 관람하는 관람객과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 간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점도 눈에 띄었다. 실내 역시 예사롭지 않다. 전시실은 각각 크기와 높이가 다른 독립적 매스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이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모여 앉으며 원형 안에서 조화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매스와 매스사이는 자연스럽게 사람이 오가는 동선이 되고, 이러한 동선은 사람들이 더욱 편안하게 공간을 누릴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도 겸한다.


사각형의 보이드 공간을 통해 자연 그 자체를 보여주는 미술관.



공간에서 찾은 순수한 자아
자연과 하나 되어 겸손한 건축물이지만, 이곳의 작품들은 그 인상과는 다르게 실험적이고 과감하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의 설치 미술 ‘스위밍 풀(The Swimming Pool)’이다. 외부에 작은 수영장을 만들고, 실제 얕은 물 위, 그리고 깊은 물속을 착시로 연출했는데, 사람이 들어가서 물을 가운데 두고 서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작품이다. 물속에서 즐거워하는 사람, 물 밖에서 평온한 사람을 관찰하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독특한 시각으로 관찰을 제안하는 작품이다.
반대로 하늘을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도 있다.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블루 플래닛 스카이(Blue Planet Sky)’다. 치밀하게 계산된 사각형 보이드 공간을 통해 하늘을 그 안에 담아내는 작품으로, 본질적인 자연을 예술로 승화해 보여주는 멋진 공간이다. 작품 안으로 발을 디디면 자동으로 문이 닫히며 자연스레 외부 공간에 서게 된다. 그리고서 만나는 자연이 참으로 경이롭다. 열린 하늘 사이로 구름이 흘러다니고 바람 소리, 새소리가 어느 때 보다 선명하다. 문을 하나 지나왔을 뿐인데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경험, 잠시 동안의 평화가 마음 깊이 찾아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굵직한 현대 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지만 개인적으로 꼽는 미술관의 백미는 따로 있다. 건축물 곳곳의 중정과 공원, 이를 향해 무심히 놓아둔 벤치와 의자들이 그것이다. 그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밀려든다. 바쁘게 살아온 지난 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 이곳에서 보낸 찰나의 사색이 앞으로의 지평선이 되어주는 시간이었다.
그때 내가 했던 생각을 공유하며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감동이 있는 공간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간이 가진 가능성임을 마음 깊이 새기며.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속도가 있을 것이다.
나의 가나자와 기행에는 그에 어울리는 속도가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속도, 길가에 수국이 피어나는 속도,
다실에서 차를 내어주는 속도, 미술관에서 작품을 따라 움직이는 관람객의 속도…

그곳의 속도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행복했었던 기억을 되새기며
지금 나는 또 현재의 상황에 맞는 속도로
나만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21st Century Museum of Contemporary Art, Kanazawa ⓒWATANABE Osamu
미술관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본 모습으로, 외벽과의 경계를 유리로 구성하고 단차를 없애 관람객과 산책하는 이들 간의 경계를 허물었다.


21st Century Museum of Contemporary Art, Kanazawa ⓒWATANABE Osamu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스위밍 풀. 수면 안팎에서 바라보는 상대의 모습을 통해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일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공간 디자이너 백종환
2005년 국민대학교 공간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2013년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5년부터 10년 동안 어소시에이트에서 근무했고 2015년 WGNB를 설립했다. WGNB는 “같은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다”를 모토로 브랜드와 사람을 담는 좋은 공기가 머무는 공간을 지향한다. WGNB가 만든 주요 공간으로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현빈 집을 비롯해 교보문고, 엔드피스, 덱스터 스튜디오, 카카오 프렌즈 스토어, 써밋 갤러리, 준지 플래그십 스토어 등이 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JCD 디자인어워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한 바 있다. 2018년에는 FRAME 어워드를 비롯해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최고상인 골드를 받았으며, 독일 디자인위원회가 주최하는 아이코닉 어워드에서 ‘2018 올해의 스튜디오’상을 수상했다.

Editor정사은

Photographer백종환, 21세기 미술관, 가나자와현